공원당과 ‘모밀소바’를 챗지피티에게 1960년대 일간지 삽화 풍으로 그려달라 했더니.
사진이 그렇고, 노래가 그렇듯이,
냄새와 맛도 기억을 들추는 데 선수다.
실은 냄새와 맛이 더 노골적이다.
기억 속 사람을, 그 풍경을
지금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래서 사무친다.
나는 충청남도 논산에서 나고 자랐다.
들깨밭 잠자리 날아다니는 시골인가 하면,
달라스 햄버거가 있는 시내까지 요이 땅! 달려갈 수 있었고,
한 시간쯤 버스를 타면 대전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닿았다.
그리고 청주.
청주는 대전보다 먼 곳이라 했다.
아마도 1983년, 큰누나가 청주교대에 입학해 집을 떠났을 때,
청주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을 것이다.
큰누나와 나는 열두 살 차이.
그땐 도무지 지금 같지 않아서,
집 떠난 누나의 소식을 잘 알 수 없었다.
나는 편지를 썼고, 누나는 답장을 보냈다.
누나가 보낸 편지들을 나는 간수하지 못했는데,
누나는 그때 내가 보낸 편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누나가 청주 오성당이라는 곳에서 ‘고로케’를 먹었다고 얘기한 건
편지에서일까, 아니면 방학 때 집으로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일까.
나는 그때 고로케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는데,
누나의 말대로라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그것은 실로 굉장한 맛이어야 했다.
1985년 겨울, 나는 엄마가 떠준 수박색 스웨터를 입고,
농구공을 들고 학교에 가면서, 고로케를 떠올린 적이 있다.
늘 이런 식이다.
맛은 기억을 잘게잘게 조각낸다.
그리고 하나하나 반짝이도록 끌어낸다.
40년이 지난 2025년 봄, 청주로 가면서
나는 논산에 있는 누나에게 오성당 고로케를 포장해 갈 생각으로 들뜬다.
오성당은 버스터미널로부터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아침 10시 반, 고로케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데,
창밖에서 들여다보니 과연 쟁반 가득,
갓 튀겨낸 고로케가 쌓여 있었다.
고로케를 주문하면 반을 잘라서 내준다. 단면을 보면
아직도 훌훌 김이 나는 채로, 양배추가 듬뿍,
모자람 없이 듬뿍, 넘치지만 않게 듬뿍,
마치 이북식 만두의 속처럼 차올라 있다.
오성당 고로케는 부드러웠다. 기억이 부드럽듯이.
질기거나 거칠지 않아서,
저녁에 식어도 내내 이렇겠구나 싶었다.
누나는 이 맛을 기억하고 있을까.
조금은 달라졌다고 말할까.
고로케 네 개를 포장한 봉지를 들고 버스를 탄다.
흔히 ‘시내’라고 부르는 지역이 도시마다 있는데
대전에서는 은행동이 그랬고, 청주는 성안길이 그렇다.
성안길을 예전에는 ‘본정통’(일제강점기 명칭)이라고들 불렀고,
버스 정류장 이름은 ‘지하상가’다.
아, 내게는 너무나 1980년대인 냄새.
성안길에는 가보고 싶은 곳이 네 군데나 몰려 있다.
공원당, 동그라미, 에이피엠떡볶이, 그리고 원조 고추만두국집.
나는 10년 전쯤 동그라미에 가본 적이 있다.
이름을 ‘해바라기’라고 기억하는 바람에
지금도 ‘동그라미’보다 ‘해바라기’가 입에 붙는 해프닝.
동그라미의 메뉴 구성은 언제 들어도 미소를 만든다.
햄버거 그리고 비빔냉면, 딱 두 가지.
방금 구워낸 패티는 뜨겁고, 참깨가 박힌 빵은 포근하다.
이번에도 수북한 양배추가 와락 입으로 안긴다.
그리고 케첩과 마요네즈의 맞춤 코러스.
이렇게나 순한 햄버거에,
비빔냉면은 단맛을 절제하는 방향에서
햄버거와 짝을 이룬다.
아, 병으로 된 오란씨 파인애플 맛이 있다면…
에이피엠떡볶이는 밖에서 메뉴를 고르고 계산한 뒤,
안에서 자리 잡고 먹는 시스템이다.
홍대 조폭떡볶이가 그랬지, 나는 자꾸 떠올린다.
청주에서 에이피엠떡볶이 모르면 간첩이라더니,
확실히 뭔가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맛이다.
청주는 교육도시로 불린다.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조금 엉뚱해서,
교육도시란 곧 학교와 학생이 많다는 뜻이겠지, 그렇담
훌륭한 떡볶이집은 얼마나 많을까, 이렇게 흘러간다.
똑같이 교육도시로 불리는 공주에 갔을 때도
‘바로 그 분식집’이 있을 거라며 공연히 설렜다.
내가 찾는 것은 그러니까, 기억일 것이다.
친구의 도시락 반찬이고, 엄마가 떠준 스웨터고, 누나의 편지인 것들.
에이피엠떡볶이에서는 포크와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창이 두 개 달린 작은 스테인리스 포크.
붉고 둥근 쿠션에 검은 색 철제 다리가 달린 의자.
그 포크를 쥐면 새처럼 입이 좁아져 오물오물 떡볶이를 씹게 된다.
그 의자에 앉을 땐 엉덩이가 배겨도 신이 난다.
에이피엠떡볶이를 끼고 골목길로 접어들면,
또 하나의 문제적 떡볶이집, 소문난부부떡볶이가 있는데,
일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고는 바로 공원당이다.
공원당에서는 창밖으로 중앙공원이 내다보인다.
중앙공원에는 예스러운 운치가 있는데,
새로 급하게 조성된 무드가 아니라,
원래 이랬던 곳의 향기를 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원당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무슨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아, 이 냄새 알아’ 누구에겐가 말하는 것처럼 되었다.
진한 멸치 국물이 솥에서 펄펄 끓는 냄새,
그 푸짐한 김이 오래오래 실내에 밴 냄새,
여기서의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음을 홀연히 드러내는 감각.
왠지 글썽이는 기분이 된다.
지금은 사라진 논산의 일미당에서 맡았던 냄새 같아서.
일미당이 논산에 남아 있다면, 이런 얘길 누나와도 자주 했다.
냄새는 이렇게나 투명하고 즉각적이다.
공원당은 1963년에 개업했다.
처음엔 빵을 팔았고, 지금은 돈가스를 한다.
창밖의 공원에서 윷을 던지는 할아버지 중엔
공원당 빵맛을 아는 이도 있을 터였다.
그리고 우동과 ‘모밀’이 있다.
‘모밀’의 바른 표기는 메밀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밀’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짐작한다.
기억은 완강하고, 우리는 기억 앞에 순해지니까.
공원당의 ‘모밀소바’는 참 맛있었다.
더하고 뺄 것이 없었다.
여기는 처음부터 이랬다는 믿음만이 가지런했다.
그건 레시피의 문제를 넘어선다.
약속이라서다.
공원당의 약속, 이런 제목도 어딘가에는 있겠구나 생각했다.
공원당을 나와 쫄쫄호떡 앞의 긴 줄을 본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새로운 기억을 청주에서 쌓아가는 중.
내 것과 나란할 수도, 빗겨갈 수도,
언젠가 합쳐질 수도 있는 시간을 상상하면서
배도 꺼뜨릴 겸, 중앙공원을 몇 바퀴 돌았다.
앉아서 사람들이 봄볕을 쬐는 모습을 천천히 봤다.
원조 고추만두국집은 이른바 ‘전국적인’ 인지도가 있는 집이다.
연관 검색어가 ‘웨이팅’이라니 알 만하다.
그래서 일부러 애매한 시간에 갔고,
바로 입장해서 고추만두국을 시켰다.
고추는 만두가 아니라 국물의 고추를 말하는 것이었다.
빨간 국물이 맵다. 아니, 매워 보인다.
실제로는 맵지 않고 칼칼한 맛이 단정하게 퍼진다.
속을 긁지 않고, 다독이듯 풀어낸다.
절여서 삭혀낸 고추의 매력이다.
그런데 김 가루는 신경이 쓰였다.
내게 김 가루는, 아무 데나 이유 없이 살포된 검은 조각이라는 선입견이 있다.
아무 데나 통깨를 들이붓거나, 아무 데나 치즈를 쏟아버리거나 하는 식을
나는 요리가 아니라 장난이라 여기고 있는데, 김 가루도 그 범위에 속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집의 김 가루에는 이유가 있었다.
웬걸, 없으면 안 될 딱 맞는 하나였다.
만두도 좋았다. 화려한 국물을 드러내기에
정작 자신은 절제하는 몸. 그런 균형감.
나오다 보니 원조 고추만두국집은 두 개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하나는 오래된 간판(투명 아크릴 박스로 액자처럼 걸어놓았다)이고,
하나는 새로 만든 간판이다.
이런 균형감이 곧 맛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려니, 마음을 데웠다.
이제 밤이 오고, 저기가 무심천이구나 싶은 다리를 건넌다.
청주에서 하룻밤을 묵는 건 처음 있는 일이고,
청주에서 오래된 분식집을 찾는 여정은
내일 아침 다시 오성당에서 고로케를 사는 걸로 계속될 예정이다.
실은 아까 중앙공원에서,
오늘 포장했던 고로케를 윷 노는 아저씨들과 나눠 먹었다.
큰누나에게는 내일의 고로케를 전해줘야지.
새롭고 좋은 마음이다.
그러고는 마지막 목적지 용암동 시골할머니손칼국수에 갈 것이다.
점심만 얼른 해서 나누고, 바로 문을 닫는 집.
나는 이 집을 어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검색을 하다가
양푼에 담긴 아.무.렇.지.도.않.은 칼국수 사진에 금세 매료되었다.
‘맛 없어도 돼, 그럴 리도 없겠지만.’
칼국수에 대한 기억이라면,
논산군청(지금은 취암동주민센터) 앞에 있던 돌분식이 맨 처음 생각난다.
거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최수란네 엄마가 하시는 식당이었고,
우리는 수란이네 집에서 다 같이 숙제를 하자는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돌분식 테이블을 차지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뜨끈한 칼국수가 우리에게 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칼국수엔 재첩이 많이 들어 있었다.
고춧가루 양념을 풀어 벌건 국물을 만들고, 고명으로 쑥갓을 얹는 칼국수 레시피가
전형적인 충청도식으로 불리는 마당이지만, 비슷하다고 다가 아닌 것처럼,
나는 돌분식 칼국수 같은 칼국수를 여태 먹어보지 못하고 있다.
주방과 홀이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는 식당에서는
서로의 태도와 할 일이 선명해지기 마련이다.
음식이 착착 나오고, 테이블이 착착 정리된다.
행여 주문이나 요청은 두 번 물을 것도 없다.
응당 손님의 마음도 편안해진다.
얼마나 호흡을 맞춰왔으면 이렇게도 자연스러울까.
칼국수는 커다란 양푼에 가득 담아서 나왔다.
큰 그릇에 덜어, 먹는 재미를 추가할 수도 있다.
국물 없이 면만 퍼서 고추양념을 더하면 매운 비빔국수,
삭힌 고추지만 슬쩍 넣으면 매콤한 듯 감칠맛이 도는 또 다른 칼국수,
반찬으로 나온 콩나물과 김치를 넣고 양념에 비비면 어쩐지 색다른 비빔국수.
하나의 음식이 여러 얼굴을 갖는 즐거운 원리가
후룩후룩 펼쳐진다.
그리고 오후 3시가 되면, 문을 닫고 내일의 반죽을 민다.
가게 한쪽에 뽀얗게 첫눈처럼 밀가루가 내려앉은 작업대가 있다.
정갈하고 우아한 작업대다.
할 일을 할 일만큼 해내는 것.
마치며 정리하고 도구를 바르게 놓는 것.
그것이야말로 음식과 사랑의 마음이 아닐는지.
밀가루 음식을 연거푸 먹느라
어쩌면 속이 부담이었을 텐데,
이 칼국수는 그저 담백하게 내려앉는다.
그 대신에 엄마와 여기를 언젠가 한번 들르게 될 것 같은 기대가 피어났다.
다음에는 누나의 학교였던 청주교대에 한번 가볼까.
누나의 하숙집이 있었던 수곡동 골목길을 한번 걸어볼까.
거기에서 또 어떤 맛과 기억을 우연히 만나게 될까.
청주를 벗어나며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친다.
청주로 들어올 땐 눈치를 못 챘던 길이다.
그래, 청주 하면 옛날부터 플라타너스 진입로가 유명했지.
맞아, 너희는 분명 그때의 나무들이군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안녕히 계세요.
창밖을 길게 쳐다보았다.
가방 속에서는 오성당 고로케가 들어 있는 봉지가 바스락거렸다.
장우철
글과 사진을 다루는 사람.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산다. 15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다져온 특유의 감각을 바탕으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다. 에세이 〈여기와 거기〉, 〈좋아서 웃었다〉, 〈a boy cuts a flower: 소년전홍〉을 썼고, 사진집 〈406ho〉와 〈COLUMNED〉를 펴냈다. 종로구 이화동에 자신의 아뜰리에 ‘미러드mirrored’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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