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볶은 커피, 오래된 식당, 가마솥 청주 여행과 물건|박찬용

오송역 5번 출구. 길게 줄 서 있는 택시 중 하나를 타고 청주 시내로 향한다. 기사님은 점잖고, 말수가 별로 없다. 내가 말을 걸자 대답도 업무의 일부라는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런 기사님들을 좋아한다. 기사님 말씀에 따르면 오송, 청주, 세종이 삼각형을 이룬다. 세 지역 사람들이 서로 오가고, 청주에는 학교와 일거리가 많아 활기가 있다고. 그 말을 증명하듯 차창 밖으로 건설용 고층 크레인이 보인다. 오송역과 청주 시내는 택시로 20분 정도. 그 사이 훌륭한 지역 브리핑이 끝나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한다.

레이어커피. 동부창고 근처, 국립현대미술관 뒤쪽에 위치한다. 청주에 인구 대비 카페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카페 몇 곳을 추천받았다. 레이어커피는 그중 가장 이른 시간인 오후 6시에 문을 닫아 제일 먼저 찾았다. 레이어커피의 강성식 대표는 마침 내 책을 전부 읽어서 보자마자 나를 알아보았다. 내 부모도 다 읽지 않은 책을 봤다니, 그의 성격도 남다른 것 듯하다. 레이어커피에도 그만의 면모가 있다.혼돈된 듯 정리된 정도, 피겨와 동양화와 디자인 가구와 서예 작품이 함께 걸린 중첩, 혼돈된 고객에게 친절하고 커피에 엄격한 태도.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싶어 레이어커피드립 백을 샀다. 청주에서 산 첫 번째 물건이다.

레이어커피를 나와 두 번째 카페로 향한다. 일면식. 내가 느끼는 한국 감성 카페 유형에 속하는 곳이다. 감상적인 어감의 한자어 상호. 입구의 턴테이블, 그러나 음악은 블루투스로 튼다. 강성식 대표는 청주 카페의 특징으로 “은근히 유행이 빠르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다만 일면식은 외피가 어떨지 몰라도 이곳을 이루는 정서는 다정하고 느긋하다. 좌석 간 간격은 넓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앉아 각자의 일을 한다. 공부, 수다, 독서. 충청의 넉넉함이 이런 건가 싶다. 책장에는 방문객의 방명록 공책이 40cm쯤 되는 높이로 쌓여 있다.

다음 카페는 청주여고 앞 먼치바이트. 역시 기분 좋은 동네 카페다. 학교 앞 카페라 토요일에는 사람이 없다. 인적이 드물어 조용한 학교 앞 거리에서 5:5 가르마에 체크 셔츠를 입은 사장님이 월요일에 판매할 구움과자를 굽고 있다. 스모어 쿠키 앞에는 “**쌤이 기증한 마시멜로로 만든 쿠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쌤이 누구냐 여쭈니 청주여고 선생님이라고 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청주여고 학생들의 추억이 구워질 것 같다.

연달아 커피를 세 잔 마셔서인지 커피의 요정들이 뱃속에서 수세미질을 하는 것 같다. 밥을 먹어야 한다. 찾아둔 곳이 있다. 삼미식당. 소상공인진흥공단이 선정하는, 업력 30년 이상의 소상공인인 ‘백년가게’ 업소다. 찾아보니 메뉴가 둘뿐이다. 족발과 수제비. 마음에 든다. 맛은 더 대단하다. 소박한 재료를 엄격히 다듬어 간결하게 익힌 요리다. 신선한 돼지 족을 간장종물에 마늘과 생강만 넣어 삶아 식힌다. 시류에 영합하거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은 족발의 이데아 같은 맛이 난다. 탄수화물을 더하기 위해 설계했을 수제비마저 훌륭하다. 간판에는 ‘충청북도 대물림 계승업소’와 ‘청주시 향토음식 지정업소’ 인증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진흥공단-충북도-청주시의 인증 트리플 크라운을 받은 셈이다. 맛은 미쉐린 가이드의 표현을 빌린다. 이 족발을 위한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맛.

삼미식당이 너무 인상적이라 예정에 없던 식당에 또 간다. 청송통닭. 삼미식당처럼 단일 메뉴로 백년가게 인증을 받았다. 중앙공원 근처인 숙소와 멀지 않아 포장해서 가져왔다. 숙소 테이블에서 한 입 먹으니 역시 충격적이다. 장난과 눈속임은 없고, 좋은 재료와 원칙이 있다. 잔재주 없이 간결하며 진솔한 맛이다. 보통 치킨 무보다 2배쯤 길게 썬 무 역시 훌륭하다.

커피를 세 잔 마셨더니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원고 마감과 다음 날 방문할 식당을 한참 찾다 보니 동이 틀 것 같다. 조금만 자야겠다 생각하며 눈을 붙인다. 이튿날 첫 목적지는 근처 남주동해장국. 도시 공동화가 느껴질 만큼 텅 빈 상점가를 지나자 이곳 앞에만 차가 가득하다. 이곳은 메뉴가 셋이지만 사실상 단일 메뉴다. 선지해장국, 소고기해장국, 갈비탕은 모두 계통적으로 같은 요리니까. 맛 역시 인상적이다. 국물은 붉을 뿐 고통스럽게 맵지 않다. 그릇은 온도를 머금으려는 듯 쉽게 들기 힘들 정도로 묵직하다. 겉으로는 양이 적어 보이지 않지만, 고기는 그릇 가득 가라앉아 있다. 충청의 품위와 인심이 이 한 그릇에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남주동해장국 벽에는 사진이 붙어 있다. 1950년대의 남주동. 우시장이었다고 한다. 우시장 가까이 있는 곳답게 남주동해장국 근처에는 농기구 가게가 지금도 자리한다. 볼 게 있나 싶어 기웃거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무쇠 가마솥을 사고 말았다. 아직도 쉿물을 녹여 무쇠 주물을 만드는 광주의 대흥주물제다. 무쇠다 보니 묵직함이 가벼운 아령 수준이다. 청주에서 스페셜티 커피 원두나 사 갈 줄 알았는데, 삽시간에 아령 같은 가마솥을 비닐봉지에 넣고 걷게 된다.

육거리종합시장을 지나 다이어커피에 도착한다. 다이어커피는 가마솥을 들고 가는 게 황송할 만큼 콘셉추얼한 커피숍이다. 입구로 난 창이 전혀 없어서 들어가면 암흑이다. 가게 소개와 메뉴 안내는 입구의 QR 코드를 스캔하면 나타나는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곳의 레귤러 원두로 만들었다는 에스프레소 두 잔과 시즈널 블렌드 드립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노천극장 객석 같은 구조의 자리에 앉으면 DJ 박스 자리에 서 있는 듯한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린다. 유튜브에 ‘카페 음악’이라고 치면 나올 법한 앰비언트 음악이 계속 흘러 나온다. 현대사회의 커피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다음 목적지행 택시가 도착한다.

택시는 청주 구도심을 벗어나 근처 산업단지로 향한다. 한국도자기 청주아울렛. 한국도자기 본사 청주공장 옆에 있으니 말 그대로 공장형 아울렛이다. 한국도자기는 한국 최고의 본차이나 제조사. 본차이나는 일반적으로 소의 뼛가루를 원료로 만들어 특유의 우윳빛 흰색이 매력적이다. 한국도자기 아울렛에는 품질검사를 통과하지 못했으나 나로서는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는 본차이나 등외품 접시가 1,500원부터다. 한국도자기에서 수입한 다양한 수입 도자도 있다. 나는 등외품 본차이나, 이탈리아산 체르보 유리컵, 포르투갈산 몰데 접시 등 온갖 걸 한 손 가득 산다. 가마솥에 이어 짐이 더 무거워진다.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새로이 카페촌이 된 고인쇄박물관 구역에 자리한 컴포트커피다. 이곳도 요즘 도시 사람이라면 익숙한 멋쟁이 카페다. JBL 스피커, 아르테미데와 플로스의 조명들, 아르텍 스툴 같은 물건들이 놓여 있다. 그 자리에서 다양한 젊은이들이 요즘 그들의 화제를 말한다. 울쎄라, 한국 축구, 녹록지 않은 직장 생활. 그야말로 젊은이 이야기 아닐까.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청주의 일상적인 주말이 흘러간다.

이야기가 끝나간다.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이유는 순전히 분량 때문이다. 이야기를 벗어난 내 실제 다음 목적지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버섯찌개만 파는 경주집에서는 일종의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성안길을 한 바퀴 돌며 중고서점에서 책을 샀다. 이름부터 심오한 무심천변의 주니스커피에 앉아 이번 여정의 마지막 커피를 마셨다. 청주 카페 특유의 넓은 좌석을 즐기다 오송역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오송역에서 서울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청주에 곧 또 가고 싶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많다. 청주의 박물관과 미술관, 동선 때문에 가지 못한 청주 시외의 대형 카페, 이번에 정말 제대로 즐긴 식당과 또 다른 ‘청주시 향토음식 전문점’들. 주장이 강하진 않으나 방향은 확실한 도시와 음식들, 이것이 충청인가 싶은 은근한 뉘앙스와 유머들. 예를 들면 청주시 백년가게 중 하나인 연게소문에 빨리 가보고 싶다. 연게소문은 연개소문의 오타가 아니다. ‘연탄구이와 돌게장이 소문난 집’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유머를 무척 좋아한다.

박찬용

프리랜스 에디터, 저자. <에스콰이어> <크로노스> <아레나옴므플러스> 등에서 일했다. 소비생활의 요소를 조사하고 관찰해 생활 정보를 만든다. <요즘 브랜드> <모던 키친>등을 썼다. 집수리에 대한 일곱 번째 책을 쓰고 있다.

  • 잘 볶은 커피, 오래된 식당, 가마솥
    청주 여행과 물건|박찬용
  • Edit Areum Lee WriteChanyong Park Photograph Chanyong Park IllustrationSo won(Neap)

Editorial De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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