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이 남긴 이야기 청주의 문화유산|배기동

유물이 남긴 이야기 청주의 문화유산|배기동

유물이 남긴 이야기 청주의 문화유산|배기동

청주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 이래 유적을 보면,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청주를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개한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청주 동쪽에 우뚝 솟은 우암산과 병자호란 때 청주 사람들의 부모 역할을 했다는 부모산은 물론 미호강, 무심천을 비롯해 강을 따라 너른 들이 펼쳐지는 청주 일대 풍경은 청주시의 비전 중 하나인 ‘생명문화도시’라는 단어의 진정성을 대변하고 있다.

청주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 이래 유적과 기록을 보면,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청주를 “조선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개한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삼한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청주의 역사 기록

유물과 기록을 통해 오래전 청주의 옛 모습, 그리고 청주가 시대마다 어떤 역할로 자리했는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그 유물 중 하나는 삼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주를 중심으로 한 삼한 시대의 기호지방은 마한의 중심 세력이 잡고 있던 곳이다. 그래서 국립청주박물관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마한 토기와 함께, 소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든 청동거울과 청동제 마형 대구를 볼 수 있다. 특히 백제 시대에는 이곳을 ‘상당현上黨縣’이라고 부르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로 활용했는데, 당시 청주의 위상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로 판단할 수 있고, 그 시대의 문화는 신봉동 고분과 같은 유적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청주는 신라시대 이후 오랫동안 기호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신라가 통일한 이후 신문왕대에 각 지역에 다섯 도시에 작은 서울을 정했는데, 청주가 그중 하나인 ‘서원경西原京’인 것이 그 예다. 이 이름은 아직까지 청주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지역에 청주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고려 시대에 이곳에 목을 설치하면서다. ‘중원경中原京’이라 불렸던 충주가 경상도 지방에서 한강 교통로를 따라 북으로 연결되는 중심지라고 한다면, 청주는 서쪽의 평야와 해안 지대가 연결되는 곳이다. 상주 지역에서 보은을 거쳐 기호 그리고 경기 지역으로 연결하는 동남-경기 연결 축의 거점 교통 요지이기도 하다.

손잡이에 말 탄 무사가 달린 마한 토기의 모습.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국립청주박물관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마한 토기와 함께, 소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단히 정교하게 만든 청동거울과 청동제 마형 대구를 볼 수 있다.

산성의 도시, 상당산성과 정북토성

상당산이 머리에 띠를 두른 듯한 상당산성의 성벽은 위기 때마다 청주 사람의 울타리가 되어준 파수꾼이다. 신라 창건 무렵부터 존재했으나 지금의 모습으로 개보수된 것은 조선 숙·영조대에 이르러서다. 상당산성은 국립청주박물관 입구에서 멀지 않은 산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지지만 넓직한 광장이 성문 앞에 펼쳐져 있어 시원한 풍광을 자랑한다. 조선 초기, 김시습이 황혼녘에 넋 놓고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가 잔디 광장 입구 큼직한 돌에 새겨져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4.2km, 높이 4~5m에 이르고, 면적은 22만 평(72만㎡)이나 되니 아마 당시에도 그 웅장함이 장관을 이루었을 듯하다.후삼국 시대 청주 지역의 핵심 방어 및 정치 거점이던 곳이 또 있다. 청원구 정북동에 위치한 정북토성이다. 청주 미호천과 무심천이 합류되는 지점인 까치내 주변 평야에 자리한 이곳은 상당산성과는 달리 평지형 토성으로, 현존하는 토성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우수한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인 2~3세기경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추정하는데, 〈상당산성고금사적기上黨山城古今事蹟記〉에 따르면 궁예가 청주에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으로 삼은 이후, 견훤이 이 산성을 점령해 그 주변, 즉 오늘날의 정북동 일대에 정북토성을 쌓았다는 전승이 있다.

상당산성 남문 앞 잔디광장의 풍경.

조선 초기, 김시습이 황혼녘에 넋 놓고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가 잔디 광장 입구 큼직한 돌에 새겨져 있다. 돌로 쌓은 성의 둘레가 4.2km, 높이 4~5m에 이르니, 당시에도 그 웅장함이 장관을 이루었을 듯하다.

용화사의 삼불전과 일곱돌부처

청주의 구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무심천. 용화사는 청주 무심천 근처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선덕여왕 때 지어졌으며, 조선 인조 6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영조 18년에 벽담선사가 다시 짓고 용화사라 이름 붙였다. 창건과 관련된 신비로운 이야기도 있다. 20세기 초 용화사 개찰 직전, 낮잠을 자던 고종의 후궁인 엄비의 꿈에 일곱 부처가 나타나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였으니, 큰 절을 지어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엄비가 고종에게 이를 전했고, 사람들을 보내 알아보게 했는데, 서쪽에 큰 늪이 있었고 그 안에 7개의 석불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높이가 가장 큰 것은 최고 5.5m, 작은 것도 1.4m에 달하는 거상이다.

이 절은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촬영지기도 한데, 해 넘어가는 시간에 무심천에서 용화사를 바라보는 풍광이 정말 ‘글로리어스’하다. 용화사의 돌부처를 보고 있자면 궁금증이 인다. ‘왜 충청 지방에는 고려 초기 키 큰 돌부처 입상이 많을까’하는 것이다. 논산의 은진미륵, 충주 미륵리사지의 돌부처 그리고 용화사의 부처들. 우리가 잘 모르는 고려왕조 초기의 불교 문화 지역 패턴이 이 청주 지역에도 있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용화보전에 모셔진 삼불전. 왼쪽부터 약사여래불, 미륵불, 석가모니불이다.

왜 충청 지방에는 고려 초기 키 큰 돌부처 입상이 많을까. 우리가 잘 모르는 고려왕조 초기의 불교 문화 지역 패턴이 이 청주 지역에도 있었음을 추측하게 만든다.

청주, 직지가 상징하는 그 이상의 문화 도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은 청주 시내에 있는 흥덕사지에서 제작했다. 1985년에 발굴한 흥덕사지에는 작은 법당과 석탑이 복원되어 있고, 바로 그 옆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직지〉는 우리 민족의 창의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직지〉의 제작 과정과 한국 인쇄문화의 발전사를 정리해 둔 청주고인쇄박물관.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전시를 준비하며 〈직지〉를 빌리러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방문한 바 있다. 100여 년 전 한국을 찾은 프랑스 공사가 〈직지〉를 구입해 파리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고, 그 소유권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부의 간곡한 부탁에도 결국 대여를 거절당해야만 했다. 행여 한국으로 가면 〈직지〉가 다시는 파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이 깊이 남았으나,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다. 청주시가 직지에서 얻은 교훈으로 뛰어난 청주 문화유산을 더욱 세심하게 보존하고 활용해 지역 고유의 문화를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배기동

고고학자이자 박물관 전문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 한국박물관교육학회 회장,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 이사장, 국제박물관협의회 국가위원회 의장, 아시아태평양지역연합 박물관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아시아의 인류 진화와 구석기문화〉, 〈대한민국 박물관 기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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