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도시 청주의 아름다운 명소|윤광준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도시 청주의 아름다운 명소|윤광준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도시 청주의 아름다운 명소|윤광준

청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유명세로 사람을 부르지 않는다. 서울처럼 화려하지 않고, 전주처럼 감각적으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경주나 부여만큼 역사의 고도도 아니며, 볼거리도 많지 않다. ‘여행 한번 가볼까’ 생각한 사람들도 청주를 목적지로 삼지 않고 지나치는 길목으로 여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도시가 청주다. 이 도시에 머물며 자세히 들여다볼 때 이곳의 진가는 드러난다. 소란스럽지 않은 풍경, 일상의 시간과 예술이 겉돌지 않게 스며든 공간, 지층에 쌓여 있는 기록과 기억들은 무심코 지나치던 청주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그래서 진지한 시선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에게 청주는 속 깊은 친구처럼 다가온다.

강력한 한방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짙은 울림을 지닌 도시가 청주다.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의 침울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선했다. 반도체 생산기지로 활기찬 평택과 나란히 SK하이닉스나 LG 등 대기업의 생산 시설이 이곳에 있는 탓이다. 청주에 들러 거리를 오갈 때마다 마주치는 젊은이들의 표정과 동선의 인상은 초록색처럼 푸르렀다.

한반도의 내륙에 자리 잡은 충청북도는 바다를 볼 수 없다. 그 대신 잘생긴 산들 사이에 박힌 너른 논과 밭이 청주의 정원 역할을 한다. 바다가 없다고 해서 아쉬워할 것도 없다. 전국에서 가장 큰 호수 2개가 청주 인근에 있다. 산과 물이 어울린 조화의 풍경 속에 머물고 싶다면 단연 청주로 와야 한다. 너른 호수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바다에 결코 꿀리지 않는다. 사람의 기억은 단선적이라 내륙과 물을 쉽게 연관 짓지 않는다. 청주의 곳곳을 돌아보니 물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찾는 횟수가 늘어나자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운 장소들이 또렷해졌다. 흘려버리지 말아야 할 명소를 내 나름대로 선별해 보았다.

강력한 한방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짙은 울림을 지닌 도시가 청주다.

수면 위에 드리운 사색의 풍경, 대청호반길

도시의 소음이 사라지고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대청호. 충청북도와 대전 사이에 걸쳐 있는 이 인공호수는 특히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쪽 호반길이 가장 고요하고 정제된 풍경을 보여준다. 숲과 갈대밭 나무 덱과 물빛이 이어지는 길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알맞다.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문의문화재단지에서 시작해 자연생태학습관까지 이어지는 코스는 걷기만 해도 인위적인 느낌 없이 자연의 질감만이 다가온다. 저절로 숨이 쉬어질 것 같다. 도심과 다른 리듬의 바람이 부는 호숫가의 풍경은 축복이다. 얼굴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말 걸어오는 친근한 이웃의 목소리 같기도 해서다.

권력의 공간이 시민의 쉼터로, 청남대

한때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사용했던 청남대. ‘청와대 남쪽에 있는 별장’이라는 뜻의 이곳은 넓은 정원과 산책로 호수와 전시관을 품고 있다. 이곳은 1983년부터 20년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금은 시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공의 공간이다. 역대 대통령의 동상과 철학을 담은 길을 따라 걸으며, 이 공간에 축적된 권력과 사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범접하기 어려운 권력의 공간이 시민의 쉼터로 바뀐 청남대는 여전히 아름답다. 애써 외면하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 있더라도 세월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석양에 비치는 햇살 너머의 세콰이어 길과 연못의 분수를 보고 있자면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청주에 들른다면 일부러라도 찾아올 만한 가치가 있다.

저절로 숨이 쉬어질 것 같다.

도심과 다른 리듬의 바람이 부는 호숫가의 풍경은 축복이다.

호수와 예술이 만나는 장소,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대청호를 따라 차를 달리다 보면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속에 펼쳐진 이 미술관은 건물 자체가 조형물처럼 보일 만큼 눈에 띈다.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반영한 수준 높은 기획 전시는 의외의 장소에서 대단한 것을 볼 때의 울림을 준다. 신박한 조각품들을 상설 전시하는 야외 조각공원은 사유와 예술이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한 결과라고 여겨질 만하다. 자칫 스쳐 지나가기 쉬운 공립 미술관이지만 그 존재감은 만만치 않다. 한적한 산책길 너머로 보이는 대청호의 잔잔한 수면,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예술의 장면들은 이곳의 기억을 강렬하게 바꾸어놓는다. 예술과 자연이 나란히 놓여 있어도 위화감 없는 풍경이다. 

문자로 세상을 바꾸려던 곳, 청주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 

‘청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다. 〈직지直指〉가 1377년에 인쇄된 곳이 바로 흥덕사다. 지금은 절터만 남은 그 자리에 이 기록 유산의 위대함을 기리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목판에서 금속활자, 납활자까지 이어지는 기록의 진화 과정과 문자가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박물관은 진지한 시선으로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이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직지〉는 1972년에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 밝혀졌다. 우리의 문화유산 가운데 세계에 자랑할 만한 강력한 힘을 지닌 게 〈직지〉다.

눈에 보이고 만져질 때 역사의 서사는 기억으로 굳어진다.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완성해인쇄 기술을 전파한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그렇다. 독일 전역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과 흔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구텐베르크와 그가 제작한 최초의 출판물인 구텐베르크 성서를 떠오르게 하는 장치로 손색없다. 그에 비하면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이전에 제작한 〈직지〉의 존재감은 많이 떨어진다. 만든 사람이 부각되지 않은 채 인쇄본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지〉는 현재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어 그저 역사적 사실로 다가올 뿐이다. 다행히 〈직지〉가 만들어진 흥덕사 절터에 고인쇄박물관이 생겨 아쉬움이 그나마 덜하다. 

박물관 바깥의 흥덕사지 잔디밭을 거닐면 이곳이 단순한 절터가 아닌 기록의 중심지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부근에는 직지문화공원과 청주고인쇄박물관거리가 이어진다. 길을 따라 조성된 예술 조형물과 서점, 직지 관련 소품점들은 이 일대의 문화적 정체성을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반영한 수준 높은 기획 전시는

의외의 장소에서 대단한 것을 볼 때의 울림을 준다.

 

낡은 창고에서 피어난 도시의 감각, 동부창고

도시 한가운데 오래된 담배 창고가 문화의 허브로 다시 태어났다. 동부창고는 1960~1970년대에 활용되었던 연초제조창 부지를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 공간이다. 전시실, 공연장, 북카페, 작업실이 창고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반긴다. 이곳은 창조라는 것이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언저리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불완벽하게 느껴지지만 시간의 흔적이 메우는 공간 조율의 안정감이 좋다. 울림 있는 공간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 오래된 기둥 사이로 비치는 빛 등 동부창고만의 분위기는 감각적인 여행자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도시 외곽에서 만나는 시간의 층차, 상당산성과 산성마을

청주의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조선 초기에 지어진 석축 산성인 상당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482m의 상당산을 둘러싼 4.2km의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고요한 풍경과 함께 시간의 층차를 느끼게 된다. 특히 산성마을 방향으로 내려오면 오래된 돌담과 한옥, 예스러운 골목이 이어진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성곽이 마을의 경계이기도 하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실감하게 하는 흔적은 청주 역사의 입체적 얼굴로 다가온다. 산성마을에 숨어 있는 북카페와 작은 갤러리는 그 여운을 이어주는 감미로운 쉼표가 된다.

켜켜이 쌓인 시간을 실감하게 하는 흔적은

청주 역사의 입체적 얼굴로 다가온다.

청주는 유행을 따르는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흥미보다 울림이, 화려함보다 결이 다가오는 이 도시는 어설픔이 섞인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격이다. 대단한 유명세 없이도 머물수록 진심이 다가오는 곳이랄까. 청주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면 안 된다. 느릿느릿, 놀멘놀멘, 마음 가는 대로. 양보할 것 다 양보해도 뭔가 묵직함이 남는다. 충청도 사람들이 잘 쓰는 말 “냅둬유~”가 저절로 튀어나온다면 청주를 제대로 느낀 것이다.

청주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면 안 된다.

느릿느릿, 놀멘놀멘, 마음 가는 대로.

양보할 것 다 양보해도 뭔가 묵직함이 남는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윤광준

일상의 예술화를 실천하는 작가로, 미술관과 콘서트홀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국내와 세계 여러 곳을 다녔다. 경험이 취향을 단단하게 해서 심미안으로 이어진다는 지론으로 〈소리의 황홀〉, 〈정원의 황홀〉, 〈잘 찍은 사진 한 장〉,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심미안 수업〉, 〈창조적 시선〉 등의 저서를 펴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제 것으로 만드는 일이 곧 진정 좋아하는 일로 연결된다고 믿는 선동가이기도 하다.

  • 스쳐 지나가기에는 아까운 도시
    청주의 아름다운 명소|윤광준
  • EditAreum Lee WriteKwangjun Yoon IllustrationAnuj Shrestha

Editorial De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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