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조용한 부상Mega City | 모종린
강한 로컬 정체성을 바탕으로, 청주는 '大대전' 메가시티 내에서 독자적인 문화경제 축을 담당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시의 기억은 꼭 돌로 만든 기념비에만 새겨지지 않는다. 물길을 따라 흐르고, 오래된 공장의 벽돌 틈새에 스며들며, 사람의 손으로 정성껏 빚은 공예품 위에 얹히고, 종이 위에 찍힌 오래된 활자 자국에도 남는다. 청주는 이런 다양한 기억의 결을 동시에 보여주는 드문 도시다. 도심을 유유히 흐르는 무심천의 잔잔한 물결, 한국전쟁의 아픔을 안고 형성된 수암골 마을의 벽화들, 산업의 흥망성쇠를 겪어낸 연초제조창과 그곳에서 문화적 생명력을 얻어 새롭게 피어난 문화제조창, 그리고 세계 기록 문화의 출발점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까지. 이 모든 기억이 서로를 연결하며 “기억이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가 다시 사람을 부른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도시의 기억은 물길을 따라 흐르고, 오래된 공장의 벽돌 틈새에 스며들며,
사람의 손으로 정성껏 빚은 공예품 위에 얹히고, 종이 위에 찍힌 오래된 활자 자국에도 남는다.
〈직지〉는 단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역사적 타이틀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지식과 사유가 기록과 보존을 통해 어떻게 세대를 초월해 전달될 수 있는지를 인류 최초로 증명한 기록물이다. 활자의 탄생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지적 교류를 시간과 공간을 넘어 확장한 철학적 사건이었다. 〈직지〉를 인쇄한 청주 흥덕사는 오늘날 비록 빈터로 남아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빈 공간에서 기억의 진정한 본질과 가치를 다시금 묻게 된다. 때로는 사라진 흔적들이 가장 풍성한 이야기와 사유를 품고 있듯, 청주에서 〈직지〉는 단지 책 한 권을 넘어 도시 전체가 살아온 정신적 원형과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때로는 사라진 흔적들이 가장 풍성한 이야기와 사유를 품고 있듯,
청주에서 〈직지〉는 단지 책 한 권을 넘어 도시 전체가 살아온 정신적 원형과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산업의 기억에서 문화적 재생으로
1946년에 들어선 청주 연초제조창은 수천 명의 노동자가 땀 흘리던 중부권 최대 규모의 산업 시설이었다. 전성기에는 수십억 개비의 담배를 생산하던 곳으로, 월급날이면 남문로 시장에 활기가 넘쳤다. 그 시절 기억은 아직도 청주의 골목길과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물결과 시대 변화 속에서 이곳은 점차 가동을 멈추었고, 도시 한가운데 거대한 빈 골격으로 남았다. 청주는 이 빈터를 없애는 대신 기억의 지속성을 선택했다. 옛 공장 건물을 문화적 재생 공간으로 삼아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단순한 미술관의 역할을 넘어 국가 미술품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국가 미술품 수장 센터로 자리 잡았다. 산업의 기억을 품은 건축물은 이제 예술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변화했고,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이 미술관에서 관람객은 산업이 남긴 기억과 현대 예술의 창조적 상상력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산업의 기억을 품은 건축물은 이제 예술을 보존하는 공간으로 변화했고,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이 미술관 바로 옆에는 또 하나의 기억을 다루는 장소, 청주공예관이 있다. 공예는 단순히 산업이나 생산 활동이 아니라 사람의 손끝으로 빚어낸 기억이다. 청주는 1999년부터 청주 공예 비엔날레를 통해 전통과 현대, 지역과 세계가 만나는 글로벌 공예 플랫폼을 만들어왔다. 이곳에서 공예품은 단순한 물건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작가들의 섬세한 손길로 태어난 작품들은 청주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억의 산물이다.
2020년에 설립된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는 청주의 정체성을 세계적 차원에서 재정립하고 있다. 〈직지〉가 세계에 기록을 전파했듯, 이 센터는 기록의 보존과 디지털화를 토대로 새로운 기록 문화의 글로벌 허브로 기능하고 있다. 청주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 약속을 지키는 도시를 넘어, 미래의 기록 문화를 새롭게 만드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작가들의 섬세한 손길로 태어난 작품들은
청주라는 도시가 품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억의 산물이다.
생활 속에 숨겨진 청주의 기억
도시의 진정한 문화는 거대한 박물관과 화려한 비엔날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청주의 특별한 매력은 일상 속 기억에도 숨어 있다. 연초제조창 시절의 번성하던 남문로 시장, 범죄율이 낮아 야간 통금조차 없었던 특이한 도시 풍경, 그 속에서 발전한 다슬기해장국 문화 등은 청주 특유의 신뢰와 생활 감성을 보여준다. 중앙공원의 압각수, 명암저수지의 고요한 물결, 수암골 벽화마을의 친근한 풍경들 역시 도시의 일상적 기억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연초제조창 시절의 번성하던 남문로 시장, 범죄율이 낮아 야간 통금조차 없었던 특이한 도시 풍경,
그 속에서 발전한 다슬기해장국 문화 등은 청주 특유의 신뢰와 생활 감성을 보여준다.
청주는 그저 오래된 기록을 품고 있는 도시가 아니라 그 기록을 새롭게 짓고, 보존하며,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도시다. 〈직지〉의 기술적 유산은 디지털 시대와 만나 새로운 기록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산업의 흔적들은 예술과 공예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기억은 단지 기록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살아 있는 삶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기억은 단순히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청주는 바로 그 삶의 방식을 오늘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새기고 있다.
Illustration | 최산호 작가의 몽환적인 그림으로 한 사람이 기억을 더듬어 문화와 예술의 도시 청주를 여행하는 풍경을 담았다. 수암골 벽화마을 골목을 배경으로 왼 편의 거대한 은행나무를 지나 흥덕사로 향하는 길이다. 그 끝엔 국립현대미술관이 자리한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최인선
오랜 시간 아트디렉터로서 음악·문화·예술을 아울러 전시 및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총감독 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바그네리안'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기획하며, 글로벌 기업들과 다양한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글을 쓴다. 2011년부터 '풍월당', '유니텔클래시카'에서 클래식 음악 크리에이터로 활동했으며, '조선미디어'의 문화사업팀장을 맡아 기업의 문화 사업을 개발했다. 아트스페이스 '보안1942'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며 30여 개가 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