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취향은 삶의 밀도로부터 어떤 공간에는 반짝이는 콘텐츠가 있다|김예람

분주한 서울을 뒤로한 채 청주로 가는 KTX 열차 안. 대도시가 나에게 긴 여유를 도통 허락해주지 않기에 하루짜리 기차 여행을 어떻게 즐길지 벼락치기 수험생처럼 이곳저곳을 뒤적인다. 그렇게 스마트폰 지도에 갈 만한 곳을 하나둘 저장하는데, 모아놓고 보니 대부분 구도심 방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 그럼 거기로 산책을 떠나보자.

찾아본 곳 중 제법 일찍 여는 카페이자 편집숍 ‘캡쳐(@capture_kr)’에 들어서니 언제 들어도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 드는 자미로콰이의 ‘Picture of My Life’가 흘러나온다. 여기선 프릳츠 원두로 내린 커피와 함께 간단한 디저트를 맛보고, 지하로 내려가 언뜻 둘러봐도 취향이 소나무 같은 패션 아이템과 생활 소품까지 구경할 수 있다. 사장님 혼자 방임하듯 운영하고 있어 여러 벌을 입어도 눈치가 안 보이고 할인 폭도 꽤 큰 편이라, 평소 아메카지아메리칸 캐주얼을 일본식으로 부르거나 재해석한 스타일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괜찮은 옷을 건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캐주얼한 착장에 아메카지 아이템을 더해 ‘어긋난 단정함’을 의도할 때가 많아 꽤 유심히 행어를 뒤적여보았다.

더 많은 패션 아이템을 구경하고 싶다면 같은 골목에 있는 ‘굿럭스토어(@goodluckstore_official)’의 문을 두드리면 된다. ‘POP TRADING COMPANY’, ‘SUNLOVE’, ‘SCI-FI FANTASY’ 같은 스트리트 감성 브랜드부터 ‘Somewhere Outside’, ‘OJOS’ 등의 테크웨어기능과 디자인을 모두 잡는 미래지향적 패션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이목구비가 화려하지 않은 터라 서브컬처 기반의 패션 아이템을 고를 땐 여러 벌 착용하는 편인데,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과할 정도로 입은 것 같아 마음에 드는 옷만 살포시 사진을 찍었다. 이런 스타일의 아이템은 그 자체로 화려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옷과 매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바로 구매하지 않는 게 나의 몇 안 되는 패션 원칙이다.

어울릴 만한 옷을 골라보다가, 문득 사람들의 옷차림이 서울과 꽤 다르다는 생각이 스친다. 빈티지나 아메카지 패션을 취급하는 가게가 대부분이고, 행인의 옷차림도 요즘 유행하는 발레 코어발레복을 일상복에 접목한 패션 스타일나 러닝·애슬레저스포츠웨어를 기반으로 한 활동적이면서 편해 보이는 패션 스타일 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완벽하게 갖춘 셋업보다 이미 소장하고 있는 옷과 쉽게 연출 가능한 패션을 선호하는 느낌이다. 시간과 수고를 들여 나에게 꼭 맞는 아이템을 만드는 뜨개방이 여전히 골목 곳곳에 있는 걸 보면, 이건 예전부터 현지인이 이어온 삶의 방식인 듯하다.

옷 구경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제 공예품을 보러 가자. ‘시도아카이브(@sidoarchive)’, 이곳을 찾기 위해 청주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연희동의 후미진 골목에서 작은 소품 숍을 운영하던 주인이 남편과 함께 오래된 개량 한옥을 고쳐, 매달 새로운 작가와 공예품을 판매전 형태로 소개하고 있다. 올해 8월에 오픈한 터라 정말 아는 사람들만 찾는 곳이다.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에 땀범벅이 된 나를 보고 사장님은 걱정이 됐는지 시원한 차 한잔을 내어주곤 바로 에어컨 온도를 낮추러 간다. 잠시 열을 식히고 나니 그제야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누월재운鏤月裁雲’. 유유히 떠 있는 달과 구름의 미감을 말하는 전시 제목처럼, 진열된 작품은 정성스러운 세공으로 자연을 코앞에 옮겨놓은 듯하다. ‘ㄷ’ 자 마당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비친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가볍게 떠난 여행에서 양손 무겁게 상경하고 싶지 않아 구매할 만한 작품을 신중히 골라본다. 내 마음을 동하게 만든 건 도자 공예가 김미경. 그녀는 30년 동안 ‘모래알’이라는 이름으로 바다의 파편을 형상화한 도자기를 만들어왔는데, 더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공예품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경력과 작업 디테일에 비해 기물을 낮은 가격에 판매한다. 입 큰 조개를 닮은 그릇이 유용하고 아름답기도 했지만, 작가의 넉넉한 마음이 이미 충분한 값어치를 하는 것 같아 그녀의 작품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시도아카이브 주인에게서 추천받은 스페셜티 카페 ‘멀티피치’, 얇은 줄기의 식물만을 가꾸는 ‘아웨 워크룸’, 김수근 건축가의 원초적 디자인이 인상적인 ‘학천탕’, 2만 장 넘는 LP를 보유한 음악 감상실 ‘오래된음악’. 그렇게 몇 곳을 더 구경하고 나서야 나의 하루짜리 청주 여행이 끝났다.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 한 움큼 안고 있던 청주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풀어보는데, 마주친 공간과 사람의 취향이 명확하다는 걸 깨닫는다. 주변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며 삶의 밀도를 높이다 보니 취향이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 아닐까? 종착지에 다다르면 다시 세상을 바쁘게 관찰해야 하는 내게 질문을 던지는 여행이었다.

김예람

공간과 생활에 대해 말하고 쓰는 사람. 에서 공간 전문 기자로 일했고, 경험 큐레이션 채널 ‘BLIMP(블림프)’에서 콘텐츠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요즘은 대중의 반복적 행동을 관찰하며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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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Depart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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